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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알리미(동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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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추모공원
강원 | 2023-04-30 | 조회 602

안녕하세요..


오늘은 남원시의 대표적인 인물 김주열 열사의 추모 공원에 다녀왔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추모공원에는 그의 묘역과 열사의 희생정신과 

4.19혁명의 역사적인 의미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념관과 주차장과 산책로

정자와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과 휴양시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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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10월 7일에 태어난 김주열 열사는 유복하게 자랐던 환경이었지만 부친이 돌아가시며 

가세가 기울어지게 되자 장학생으로 입학했던 남원 농고를 자퇴하고 은행원이 되고자 

1960년 마산상고에 입학하게 됩니다.  1960314일 입학 원서를 낸 마산상업고등학교에 

합격 여부를 알려고 형과 함께 남원을 출발해 마산을 방문했지만 이튿날 3.15 ·부통령 선거로 

군중이 모이는 것을 우려한 교육청 당국의 합격자 발표 연기로 마산의 이모집에 머물게 됩니다

이승만 정권이 부정과 폭력으로 재집권 하고자 3·15 부정 선거를 일으킨 것이 들통나 

마산에서 시민과 학생들에 의해 시위가 격화되자 형과 함께 시위에 나섰다가 행방불명되고 맙니다.


  시위는 평화적이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용공분자들의 난동으로 몰아 

경찰의 강제 해산과 발포로 격화되어 9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는 등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고 마는데요, 김주열 열사도 시청 앞 시위에서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이미 사망했지만

경찰이 시신을 수습해 유족에게 양도하지 않고 바다에 버려 실종 27일만인 

411일 마산 중앙 부두 앞 바다에 주검으로 떠오르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3·15 시위 이후 김주열 열사가 행방불명 상태에서 열사의 어머니는 아들을 찾기 위해 

한 달 가까이 시내를 돌아다니며 마산 시민들에게 김주열이란 이름을 각인시켰는데요

4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처참한 주검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라 부산일보에 특종으로 보도되었으며 

찰은 사건을 은폐시키기 위해 시신을 도립 마산병원으로 옮기게 됩니다

하지만 흥분한 시민들에 의해 시신이 확인되었고 열사가 입학할 마산상고 학생들이 

제일 먼저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시작했으며 이어 마산고 학생들, 시민들과 

함께 합세해 2차 항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게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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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열 열사 기념관과 추모관이 함께 있어서 그곳에서 열사의 사진들과 족보, 제적등본 등 

개인적인 정보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념관에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해설사님이 계셔서  

단체 관람객이나 개인 관람객들도 자세한 설명을 들으실 수 있으십니다. 9시부터 17시까지 계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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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는 남원(호남)의 아들이었고

죽어서는 영남(마산)의 아들이 되었으며,

4.19 혁명을 통해 국민의 아들이 되었다.......


이 분 덕분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 사회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