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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알리미(동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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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호암서원을 아시나요??
서대범 | 2022-07-24 | 조회 1687

안녕하세요  사매면 동네작가 서대범입니다

오늘 가볼곳은 조선후기의 서당 남원의 호암서원인데요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자 제가 직접 가보았습니다

그럼 함께 가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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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로 이동하여 호암서원 입구에 도착

비가 갠후라 더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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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 만도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사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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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서원에 들어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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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서원은 본래 다른 곳에 있던 서원을 1789년(정조 13)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호암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되었으나 1960년에 복원하였으며

서원 안에 있는 건물로는 사당과 강당 전사청 외삼문 고사 등이 있다

이곳에서 해마다 3월에 제사를 지낸다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5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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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문은 평삼문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에 양기와를 얹었고 벽은 시멘트를 발랐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칸 반 구조이며 팔작지붕의 형태이며 기둥은 방주를 사용하였고

평면은 대청은 배치되어 있지 않고 모두 방을 만들어놓았는데 오른쪽 방은 미닫이로 칸을 막았으나

 필요할 때 미닫이를 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각 방과 전면 퇴 사이에는 두 짝 열 개의 세살문을 달았으며 왼쪽의 방은 외짝 세살문으로 드나든다

 왼쪽 두 번째 칸 쌍부에 ‘호암서원(湖巖書院)’이라는 현액이 있다

 내삼문은 솟을삼문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양기와를 얹었고 각 칸마다 벽을 쳐서 칸막이를 하였다

삼문 밖에는 ‘호암서원 묘정비(湖巖書院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사당은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중앙에 ‘호암사(湖巖祠)’라는 현액이 걸려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공포의 구조는 간단하여 두리기둥 머리에 주두를 얹어서 들보를 직접 받치게 하였고

전후면의 창방과 평방 사이에는 굽소로를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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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서를 주벽으로 하여 심구령 안성 소연 소산복 이당 등 6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1789년(정조 13)에 건립되었고 송강 이서는 자는 양백 호는 당옹 본관은 홍주 시호는 문간 봉호는 안평군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1357년(공민왕 6)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군부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정치가 문란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1392년(태조 1)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여 조선 개국 공신 3등에 올라 안평군에 봉해졌으며 형조전서에 올랐다 

1394년(태조 3) 신덕왕후가 죽자 3년 동안 능을 수호하고 문하부참찬사가 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후 1402년(태종 2) 벼슬을 사임하고 승려 설오와 함께 함흥에 갔던 태조를 맞이하였고

 1404년 우정승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영의정이 되었다

심구령은 자는 천석 호는 병담 본관은 풍산이다

 1350년(충정왕 2)에 출생하였으며 1398년(태조 7) 대장군으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태종 이방원을 도와 정도전 등을 제거하는 데 참여하였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도 이방원 측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4등에 봉해지고 1408년에는 우군동지총제가 되었다

 1408년 왜구가 침입하자 전라도 남해안에서 왜구를 격파하였고 1909년 천주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풍산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양공이며 안성은 호는 설천 혹은 천곡이다

 1352(공민왕 1)에 출생하였고 성품이 청백하여 고려 후기 상주판관으로 있다가 1393년(태조 2) 청백리에 올랐다

 1421년(세종 3)에 후손에게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으며 시호는 사간공이다

소연은 호가 행정으로 1390년(공양왕 2)에 출생하였다

 노성현감을 역임하였고 소산복은 자는 경응 호는 매헌으로

 1556년(명종 11)에 남원 덕과면 만도리에서 출생하여 이성춘에게 글을 배우고

 형 소해복과 함께 정읍시 북면에서 일재 이항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이 일취월장하였다

머리가 명석하여 사서오경과 제자백가를 통달하였고 특히 천문과 산학에 조예가 깊었다

 1591년(선조 2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재 김천일 장군의 종사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의주 행재소를 왕래하기도 하였다

 직산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병으로 돌아왔고 뒤에 부모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느라 종군하지 못하였다

 김천일 장군이 진주에서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함께 죽지 못하였음을 통탄하여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덕과면 만도리 향리에 집을 지어 편액을 문류정이라 하였다

당시의 선비들인 민여주 오정길 김선 이점 안창국 최행 양명원 안극충 등과 어울리면서 만년을 보냈다

 이당은 주벽인 문간공 이서의 후손으로 호는 죽암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덕행이 높았고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강화가 성립되자 통탄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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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네를 보며 -